자취를 시작하면서 일리 커피머신을 장만했다. 아침마다 커피를 마시고 싶은데 바쁜 출근시간을 쪼개서 카페에 들르기가 쉽지 않았다.
한창 플라스틱 재활용 문제가 이슈로 등장했던 시기라 집에서 만든 커피를 텀블러에 담아 들고 다닐 수 있다는 점도 장점으로 느껴졌다.
캡슐커피 분리수거의 어려움
막상 일리 커피머신을 구입하고 나니 꽤 큰 부피의 캡슐 쓰레기가 계속해서 발생했다. 처음에는 귀찮더라도 손으로 캡슐을 열고, 원두를 버린 뒤 캡슐만 분리수거해보려고 했다.
예상과 달리 고무장갑을 끼고 힘껏 뚜껑을 열어보려해도 절대 열리지 않았다. 핸드폰을 들고 캡슐 분리수거 방법을 검색해 봤다.
일리 캡슐 오프너를 별도로 구매해야 한다고 했다. 기분이 나빴다. 충분히 열 수 있게 만들 수 있을 텐데 굳이 이런 오프너를 별도로 판매하는 의도가 불순해 보였다. 시간을 절약하려고 구매한 커피머신인데 별도의 시간과 노동력을 투입해 캡슐을 처리해야 한다는 점도 싫었다.
다른 방법이 없을지 고민하다 환경부의 답변을 찾을 수 있었다. 환경부가 관리하고 있는 ‘내 손 안의 분리배출’ 앱의 Q&A 답변을 보면 “사용한 커피캡슐은 종량제봉투로 배출하여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안내되어 있다.
결국 나는 그 답변을 근거로 나 자신을 합리화하며 1년 이상 종량제 봉투에 커피캡슐을 버렸다.
위선을 그만두자
아침마다 텀블러에 커피를 싸들고 출근하면 나 자신이 제로웨이스트를 실천하는 사람인 양 착각하게 된다. 실상은 매일 분리배출도 불가능한 플라스틱 쓰레기를 배출하고 있으면서 말이다.
그러다 얼마 전 유튜브 알고리즘의 추천으로 KBS 다큐멘터리를 봤다.
‘플라스틱 대한민국 불타는 쓰레기 산’
대한민국에 인간이 만든 235개의 산이 있다. 폐플라스틱 더미가 쌓여 만들어진 일명 '쓰레기 산' (KBS 20190711 방송)
2019년에 방송된 다큐지만 여전히 유요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나 역시 매일 분리수거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있다. 끓인 물을 마시려고 하지만 현실적인 이유로 여전히 생수를 주문하고 있고, 장바구니를 매번 빠뜨리고 나가서 비닐봉지를 구매하게 된다.
다큐를 본 김에 뭐라도 하나 실천해보자라고 생각하다 보니 커피머신이 눈에 들어왔다. 결국 큰 맘먹고 일리 커피머신을 당근 하기로 결심했다.
사용한 지 1년 이상 지난 제품이었지만 여전히 10만 원 내외에 판매할 수 있었다.
중고판매 후에는 언제나 개운한 기분을 느낄 수 있다. 이건 미니멀리스트가 아니어도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돈을 받고 개운해진 기분까지 얻을 수 있다니, 당근마켓은 축복이다.
앞으로 어떻게 커피를 마실까
우선은 그동안 쌓아둔 인스턴트커피를 마실 예정이다. 카누, G7 등 여기저기에서 가져온 인스턴트커피가 찬장에 많이 쌓여있다.
그 뒤에는 커피를 직접 내려먹을 예정이다. 하루에 1~2잔은 꼭 마시는 커피지만 커피에 관한 지식은 전무하다. 누르면 추출되는 커피만 먹다 보니, 관심을 가질 틈이 없었다.
조만간 당근을 통해 핸드드립 세트를 구매하여 드립커피를 마셔볼 예정이다. 어차피 보리차 같은 묽은 커피맛을 즐기는 편이라 스타벅스에서도 아메리카노가 아닌 아이스커피를 마시는 나에게는 핸드드립 커피가 딱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캡슐커피 쓰레기 문제에 대해 검색하다 보니, 해외에서는 캡슐 수거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는 제조사들이 한국에서는 해당 서비스를 제공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접하게 되었다.
한국에서는 ‘그럴 필요’가 없으니 서비스를 개악하는 너무나 익숙한 사례인 것이다.
이런 시장실패에 대해서는 환경부 차원의 규제가 필요하다. 그러나 내가 일리 커피머신을 구매한지 2년이 지난 지금도 ‘내 손 안의 분리배출’ 앱 내의 캡슐커피 배출방법 안내는 여전히 '종량제 봉투 배출'인 현실이 안타깝다.